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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봉갈길 |
새벽 2시 조금 지나 김천 역에 내려 역안 ‘만남의 장소’ 의자에 누워 잠깐 눈을 붙이고 5시 50분 대전행 통일호를 탔다. 열차 안에서 준비해 간 김밥으로 미리 아침을 먹고 6시 10분 추풍령 역에 내렸다.
힐튼장 여관 앞을 조금 지나 ‘추풍령’ 표지석을 확인하고 동쪽의 도로공사 절개지 왼쪽 포도밭 옆길을 따라 산으로 오르니 백두대간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산이 낮아서인지 등산로는 여기저기 거미줄로 막혀 있었다. 조금은 짜증나는 산행의 시작이었지만 곧 도라지꽃 한 송이가 활짝 웃어주어 거미줄에 대한 것은 곧 잊어버렸다.
산행을 시작한지 15분만인 7시에 금산 꼭대기에 올라서니 정상은 반 쪽 뿐이었다. 왼편으로 산을 잘라내 위험천만의 낭떠러지로 변한 정상 바로 아래 채석장에서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불도저가 발파로 떨어져 나온 돌덩이를 요란한 소음을 내며 돌아가는 분쇄기로 옮기고 있었다. 잘게 부순 돌들을 연방 실어내는 트럭들도 줄을 이었다.
이대로라면 얼마안가 금산 정상 부근이 무너지고, 언젠가는 산 전체가 사라져 평지로 변한 백두대간에 공장까지 들어설 날이 멀지 않을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동안 옛날부터 오르내리던 고개를 넓혀 도로로 만드느라고 백두대간을 잘라낸 곳은 많이 보았다. 그러나 백두대간을 잇는 산을 파고들어 산 전체가 사라져 가는 파괴의 현장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물론 집을 짓고 도로를 만드는 여러 가지 공사에 많은 석재가 없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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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봉을 들어서면서 |
그렇다고 해도 국토는 우리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허물지 않고 아껴 우리 후대에 넘겨줘야 그들 또한 우리처럼 아끼고 지켜나갈 것이다.
특히 우리 국토의 뼈대인 백두대간이라면 극히 사소한 일부라 하더라도 지금의 세대가 이처럼 상채기낼 권리는 없다.
금산을 넘고 작은 고개 하나를 건너뛰니 등산로 주변 여기저기에 여러 가지 버섯들이 머리를 쳐들고 있었다.
새하얀 버섯이 있는가 하면 까만 버섯도 보였다. 어릴 때 자주 따다 먹었던 송이버섯 비슷하면서도 크기가 조금 작은 것도 눈에 띄었다.
맛있어 보였지만 이놈들은 버섯박사도 잘못 먹어 종종 식중독을 일으키는 일이 있다는 그것이 아니던가. 버섯에 관한 지식이 거의 없다시피 한 나로서는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온이 올라가니 긴 바지가 땀에 젖어 휘감겼다. 502m봉 안부에서 반바지로 갈아입으니 한결 시원해 좋았다. 요란한 매미소리를 벗 삼아 열심히 걸어 502m봉을 넘어서니 건너편 멀리 묘함산 통신 중계탑이 보였다.
대간을 넘는 두 곳의 이름 없는 조그마한 고개를 지나 사기점고개에 도착한 것은 9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오른편 아래로 넓은 목장이 보이고 그곳으로 연결된 농로와 마주쳤다. 이 도로는 농장 반대쪽 즉 백두대간 왼편으로 나란히 가는 듯했으나 도로를 버리고 띠지 따라 등산로에 올라섰다.
목장 위쪽에서 시원한 물소리가 들려 배낭을 벗어 던지고 당장 내려가 물 속에 뛰어들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아마도 조그마한 폭포가 있는 듯 물소리가 제법 요란했다. 그러나 그곳까지 갔다 오려면 적어도 1시간은 잡아야 할 것 같아 포기하고 계속 걸었다.
묘함산 쪽의 통신시설과 연결된 포장도로와 마주쳤다. 무심코 맞은편 산으로 올라 능선을 타다가는 낭패를 당하는 곳이었다. 지도상에는 백두대간이 도로와 나란히 내려가다 작점고개에서 건너뛰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백두대간의 등산로가 따로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도로 따라 내려가면서 혹시 숲 속으로 들어가라는 띠지가 있나하고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아 도중에 아예 포기하고 작점고개까지 도로 따라 걷지 않을 수 없었다.
도로 곳곳에는 폭우로 유실되어 당장 무너질 듯 위험한 곳도 적지 않았다. 도로 오른쪽의 많은 한우 사육 때문인지 쇠똥 냄새가 심하게 났지만 도시의 냄새 없는 공해보다 낫지 않을까 생각하니 그런 대로 걸을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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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봉표지 |
포장도로를 20~30분 걸었을까. 길 오른쪽으로 목장 건물이 가까이 보이면서 왼편에 백두대간으로 접어드는 띠지들이 걸려 있었다. 산길에 접어드니 그늘이 많아 살만했다. 얼마안가 다시 포장도로와 마주쳤다. 김천시 어모면과 영동군 추풍령면을 잇는 작점고개였다.
앞으로 넘어야 할 용문산과 국수봉을 생각하니 어깨가 더욱 무거워졌다. 봉우리 하나를 넘으니 갈현이 나왔다. 30여m의 심한 경사 길을 오르니 바람도 제법 시원하게 부는 데다 그늘진 평지가 있어 그곳에서 점심을 먹은 다음 해먹을 치고 누워 잠깐 눈을 붙였다.
단독행이 아니라면 어느 산에서도 누릴 수 없는 호사(豪奢)였다. 20여분을 그대로 누워 있었더니 지나가는 바람에 젖은 옷이 마르면서 시원함이 지나쳐 오싹오싹 추워지기 시작하여 다시 일어섰다.
10여분을 가니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점심을 먹고 있는 젊은 도반과 마주쳤다. 연속 종주를 하느라고 제대로 먹지를 못했는지 몰골이 말이 아니고 무척이나 지쳐 있는 듯했다.
나와는 반대 방향인 추풍령으로 간다고 했다. 종주를 끝내려면 앞으로 10여 일은 더 고생을 해야겠지만 그래도 나보다 더 행복한 것으로 느껴졌다.
나는 아직 반도 못했는데 그 친구는 반을 넘어서 덕유의 긴 능선만 지나면 다음은 지리산 천왕봉을 그리며 뛸 수 있으니 말이다.
나는 당장 앞에 기다리고 있는 속리산과 소백, 태백을 넘어야 오대산을 징검다리로 설악산으로 뛸 수 있는 기나긴 행정에 생각이 미치자 나의 갈 길은 더 멀게 느껴졌다. “조심하시라”는 말을 주고받으며 나는 길을 재촉했다.
산 아랫자락에 있는 용문산 기도원을 바라보며 오르는 등산로 주변에 소나무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었지만 참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시원스레 뻗어 있었다.
반바지를 입은 나에게 바람이 살랑거리며 살포시 다가왔다. 온갖 꿈이 무성한 숲의 내음과 멀리 기도원에서 들려오는 밝은 합창소리가 담뿍 실려 있는 바람이었다.
나는 양팔을 벌여 바람을 가슴 가득히 안았다. 얼굴과 목덜미를 간질이는 그 부드러운 촉감은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헬리포트가 있는 봉우리를 지나 또 하나의 봉우리에 올라섰다. 부근 어디에 있을 용문산 정상은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대로 계속 걸으니 등산로 왼편으로 20여m 떨어진 곳에 하얀 제단이 있었다. 흰 시멘트로 만든 것인지 아니면 페인트칠한 것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아마 아래 기도원 사람들이 산상기도를 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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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점고개쉼터 |
국수봉으로 가는 도중 아래쪽에서 “야호”소리가 여러 번 들렸다. 일행을 찾는 소리려니 하고 그대로 지나가는데 계속 야호를 외쳐 혹시 사고라도 당한 것이 아닌가 하고 “야호”하고 답했더니 조용해졌다.
해발 763m의 국수봉(국수봉이 바로 용문산이라는 것은 뒷날 산행기를 정리하면서 알았다.)에 도착한 것은 15시 45분이었다.
정상 주변에 큰 나무가 별로 없어 시야가 확 트이며 상주의 넓은 들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지나쳐온 묘함산과 황악산, 그리고 그 옆으로 민주지산 등 주변의 여러 산들을 되짚어 볼 수 있어 좋았다.
국수봉이라 새겨진 정상 표지석은 상주시청 산악회가 1999년 3월 7일에 세웠고, 충북과 경북의 경계인 정상은 낙동강과 금강을 나누는 분수령이라 하여 국수봉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웅산(熊山) 혹은 용문산(龍文山), 웅이산(熊耳山), 그리고 곰산이라고 불리기도 한단다. 주변을 이곳저곳 둘러보고 있는데 조금 떨어진 서남쪽의 바위 뒤에서 50대 중반의 한 남자가 불쑥 나타났다. 얼마 전 야호를 외치던 사람인 듯 했다.
“등산 중이냐”고 물었더니 버섯 따러 왔다면서 “혹시 도중에 버섯 따는 사람 보지 못했느냐”고 되물었다. 그런데 그는 산 아랫자락에 사는 사람은 아닌 듯 국수봉에 관해 아는 것이라고는 별로 없었다.
국수봉에서 큰재까지 지도상으로는 1시간 정도의 거리라고 하지만 거의 1시간 30분만인 17시 30분 큰재에 도착했다. 야영지인 옥산초등학교 인성분교는 폐교 된지 오래인 듯 교실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고 주변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배낭을 내려놓고 우선 내일의 산행 들머리부터 확인했다. 학교와 폐허가 된 사택 사이의 길이 산으로 이어져 있었다. 키를 넘는 무성한 잡초 사이로 한 사람 겨우 다닐만한 길이었다. 산 쪽으로 50여m 올라 띠지가 붙어 있는 백두대간 들머리를 확인하고 돌아왔다.
처음에는 교실 처마 밑에서 비박을 하려다 사방이 확 트인 넓은 운동장 한가운데에 텐트를 쳤다. 사람이 살지 않는 사택 부근에서 식수를 찾아보았으나 우물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학교 정문 건너편 민가에 갔더니 우물이 있었다.
자식들은 모두 도시로 나갔는지 할머니 혼자 사는 듯했다. 물을 먹어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귀가 어두워 말이 잘 안 들린다면서 우물의 펌프 전기 스위치만 올려주고 만사가 귀찮은 듯 방으로 들어가 보던 텔레비전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산행메모 2003년 8월 14일 11:45 부산출발(무궁화호), 15일 02:00 김천도착(역 만남의 장소에서 휴식), 05:50 김천출발(통일호), 06:10 추풍령도착, 06:40 등산시작, 07:00 금산정상, 08:00 502m봉, 09:10 사기점고개, 10:30 작점고개, 11:30 갈현(점심 30분), 15:45 국수봉, 17:30 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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